이 소식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잠시 손을 멈췄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던 역사의 한 자리에 다시 물음표가 붙을 수 있다는 것. 그 낯섦이 마음 한쪽에 조용히 걸렸습니다. 역사란 완성된 것처럼 보여도 자꾸 다시 물어봐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설이 흔들리는 순간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이룬 첫 유적 발굴'로는 오랫동안 1946년 경북 경주 호우총이 꼽혀 왔습니다.

그런데 2026년 6월 5일, 경희대에서 열린 중부고고학 정기학술대회에서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가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한국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기획하고 수행한 최초의 발굴은 국립박물관 주도로 이뤄진 법당방"이라고.


법당방은 어떤 곳인가

법당방(法堂坊)은 판문점에서 개성 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경기 장단군 진서면의 고려시대 벽화고분군입니다. 지금은 북한 지역에 속해 있어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1947년 5월 1일부터 21일간 진행된 이 발굴에는 일본인도 미국인도 없었습니다. 국립박물관 소속 이홍직이 총지휘를 맡았고, 훗날 제2대 국립박물관장이 되는 김원룡이 기록을 담당했습니다. 동양화 전문가 임천과 장욱진 화백은 십이지신상과 고려 귀족이 담긴 벽화를 직접 모사했습니다.


호우총은 왜 논란의 대상이 되나

강 교수의 시각에서 호우총 발굴은 다릅니다. 조선총독부 출신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의 스승으로서 사실상 발굴을 주도했기 때문에, '탈식민화된 한국 고고학의 출발점'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론도 물론 있습니다. 이기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호우총 발굴 과정도 영화로 촬영·상영되며 충분한 공공성을 갖췄다"고 했고, 배기동 한양대 명예교수는 "호우총 발굴보고서와 김재원 회고록에는 아리미쓰가 지도위원일 뿐이었으며 전체 지휘는 김재원이 맡았다"고 반박합니다. 논의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

어느 한쪽만이 맞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이 주제를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분단이 지운 이름들

법당방 발굴이 오래 잊혀진 이유를 강 교수는 이렇게 짚습니다. 분단 이후 한반도 중부 지역이 접근 불가 영역이 되고, 신라 고고학이 주류를 차지하는 동안 개성학파라는 이름이 학계의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것입니다.

"분단 이후 법당방 발굴의 의미가 반쪽이 됐다." — 강인욱 경희대 교수

법당방 조사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이화여대 강단에 선 진홍섭 등 한국 고고학 인재 양성의 중심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뿌리가 분단이라는 현실 앞에 반쪽만 기억되어 온 셈입니다.

발굴 직후 국립박물관이 특별전을 열어 벽화 사진과 모사도를 일반에 공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공공의 성과로 이어진 발굴이었다는 뜻입니다.


결론

'최초'의 자리가 어디냐는 단순한 순서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기획했고, 누가 수행했으며, 그 성과가 누구의 이름으로 남았는가—주체성의 물음입니다.

법당방이냐 호우총이냐, 학계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 자체가 분단으로 반쪽이 된 우리 역사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충분히 소중합니다. 오래 잊혔던 이름이 다시 불려지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습니다.

지금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
- '고려벽화고분발굴기'(1954년)와 '한국 박물관 100년사'(2009년) 찾아 읽기
- 개성학파 인물들—최순우, 진홍섭, 김원룡—의 행적을 다시 살펴보기
- 강인욱 교수 발표문 '해방공간 북녘 중부지역의 고고학 연구와 개성학파'를 통해 논거 직접 확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