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국기 하나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광화문광장 '감사의 정원'을 천천히 걷다가, 저는 한 조형물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회색 석재 위에 새겨진 작은 프랑스 국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9년 전의 한 장면이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2017년 여름, 저는 국가보훈처가 주최한 '유엔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UN Peace Camp)'에 참가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참전국 후손 세대가 서로 교류하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 프랑스에서 온 또래 친구가 있었습니다. 캠프 첫날, 그 친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어."

솔직히 그 시절의 저는 그 말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온 친구와 '한국전쟁'이라는 같은 역사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2026년 봄, 그 기억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감사의 정원'은 추모 공간 그 이상이었습니다

광화문광장 한편에 자리한 '감사의 정원'은, 제게는 단순한 추모 공간이라기보다 세계와 대한민국의 기억이 서로 손을 맞잡은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지상에는 한국전쟁 참전 23개국을 상징하는 조형물 '감사의 빛 23'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각 조형물에는 참전국의 이름과 상징, 그리고 그 나라가 기증한 석재가 담겨 있습니다. 천천히 걷는 분들의 발걸음도 하나같이 느렸습니다. 빨리 지나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걸, 모두가 몸으로 느끼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 사이를 걷다가 프랑스 조형물 앞에서 멈췄고, 자연스럽게 2017년 DMZ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라고 말하던 목소리, 그리고 조용히 전시물을 바라보던 그 표정까지요.

이 정원은 곳곳에서 국제 연대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독일이 기증한 베를린 장벽 조각
  • 노르웨이의 라벤더
  • 그리스의 대리석

각국이 보내온 상징물들은, 한국전쟁이 한 나라만의 비극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지켜낸 자유와 평화의 역사였음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 조형물 앞 설명문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독일은 과거 부산에 적십자병원을 세워 약 30만 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이후 베를린 장벽 조각을 기증하며 대한민국과의 우정과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분단과 자유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 조각이 광화문광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지하 공간인 '프리덤홀(Freedom Hall)'은 또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벽면에는 '자유(Freedom)', '희생(Sacrifice)', '감사(Gratitude)', '평화(Peace)'라는 단어가 여러 나라 언어로 투사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빛으로 떠오르는 그 단어들은, 단순한 전시 문구가 아니라 세계가 함께 기억하는 약속처럼 느껴졌습니다.

혹시, 이런 마음으로 이 소식을 보고 계신가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비슷한 마음을 안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공간을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혹은 "지금 우리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너무 먼 이야기 아닐까" 하는 조용한 걱정 말입니다.

저도 솔직히 그랬습니다. 9년 전의 저는 참전용사의 손자가 건넨 한마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흘려보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압니다. 기억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괜찮습니다. 지금 그 무게를 다 알지 못해도 됩니다. 기억은 이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느 평범한 봄날의 산책에서 문득 우리를 다시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그 걱정 속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지점

제가 '감사의 정원'에서 얻은 위로는 이것이었습니다. 이 공간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외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천히 걷는 동안, 23개국의 이름과 각국이 보내온 작은 상징물들이 스스로 말을 걸어옵니다.

먼 나라의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땅의 자유를 위해 건너왔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 단단한 사실 하나가, 막연한 걱정 앞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지점이 되어줍니다.

결론: 멀게만 느껴지던 역사를, 가까운 산책으로

'감사의 정원'은 한국전쟁이 세계가 함께 지켜낸 역사였음을, 23개국의 조형물과 각국의 상징물로 조용히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9년 전 DMZ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의 한마디를 비로소 마음으로 이해했습니다.

혹시 비슷한 걱정을 안고 계신 분들께, 작은 다음 걸음을 권하고 싶습니다.

  • 광화문광장에 들렀을 때, '감사의 정원'을 천천히 걸어보기 — 지상의 '감사의 빛 23'부터 지하 '프리덤홀'까지, 빨리 지나치지 말고 한 조형물씩 눈을 맞춰 보세요.
  • 나와 연결된 나라 하나를 찾아보기 — 가본 적 있는 나라, 좋아하는 나라의 국기를 발견하면, 역사가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 함께 본 사람과 한마디 나눠보기 — 9년 전 제가 흘려보낸 한마디처럼, 지금의 짧은 대화가 훗날 누군가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느 봄날의 짧은 산책 한 번이면, 충분히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