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식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잠시 멈춰 섰습니다

걷기 좋은 5월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일대를 시와 소설을 따라 걸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출발해 서시 시비와 시인의 언덕,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을 지나, 창의문에서 백석 시인의 시 <창의문외>를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현진건 집터에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되새기는 코스라니.

걷는 내내 시 한 줄, 소설 한 대목이 발걸음 위에 포개졌다는 그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저는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합니다. 마음이 헛헛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멀리 갈 시간도 용기도 없을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럴 때 이 부암동 문학기행은 가만히 손을 내미는 것 같았습니다.

버려졌던 공간이, 기억의 공간으로

가장 마음을 붙든 건 윤동주문학관의 이야기였습니다.

인왕산 자락 청운동에 자리한 이 문학관은 처음부터 문학관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 이곳은 서울 수도국의 가압장(수돗물에 압력을 더해 멀리까지 보내주던 시설)이었습니다.

뉴스에 따르면, 2005년 인근 시민아파트 11개 단지 577세대가 노후화로 철거된 뒤, 유족과 뜻있는 시민들의 힘이 모여 2010년 윤동주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버려졌던 공간이 기억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조용히 위로받았습니다. 쓸모를 다했다고 여겨졌던 자리가, 누군가의 마음이 모이자 가장 깊은 의미를 품은 공간이 되었으니까요.

우리도 그런 시절을 지나오지 않았나요. 지금은 텅 빈 것 같고 끝난 것 같아도, 그 자리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우물 속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물'이라는 주제와 마주합니다.

물탱크를 활용해 만든 열린 우물 공간은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속 우물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자화상>에서 시인은 우물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워하고, 가엾게 여기고, 끝내 그리워합니다.

미워하다가, 가엾게 여기다가, 끝내 그리워하는 마음. 저는 이 세 단어가 우리가 스스로를 대하는 마음과 너무 닮아서 놀랐습니다.

오늘도 거울 앞에서 내가 싫었던 분들께, 이 우물이 조용히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미워해도 괜찮다고, 그러다 끝내 다시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비슷한 마음을 가진 분들은,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실까요

저는 이 코스를 떠올리며 비슷한 처지의 분들을 생각했습니다.

  • "이런 데 혼자 가도 괜찮을까" 하고 망설이는 분
  • 체력이 약해 인왕산 자락 오르막을 걱정하는 분
  • 문학을 좋아하지만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막막한 분

혹시 지금 이런 걱정을 하고 계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코스의 좋은 점은, 천천히 쉬어 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는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이 있습니다. 문학 산책 중 잠시 숨을 고르기 좋은 공간으로, 지역 주민과 탐방객 모두가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름처럼 별빛이 담긴 뜨락 같은 고요한 쉼터가, 코스의 중간 거점이 되어준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그 걱정 속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지점

문학관을 나와 인왕산 방향으로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진 시비를 만납니다.

시비 앞에 잠시 발을 멈추면, 자연스레 시의 첫 구절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했던 시인의 다짐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기서 작은 팁을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서시> 시비 뒤에는 <슬픈족속> 시도 새겨져 있습니다. 앞면만 보고 돌아서지 마시고, 꼭 뒷부분까지 확인해 보세요.

저는 이 작은 안내가 참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너무 자주, 보이는 앞면만 보고 돌아서니까요. 시비도, 사람도, 뒷면에 더 깊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입니다.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이 언덕에 서면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 산자락을 거닐며 시상을 다듬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 아닐 것입니다. 맑은 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하늘은 더없이 넓고 청명하다고 합니다.

이 언덕은 낮뿐만 아니라 서울 밤풍경 명소로도 유명하다고 하니, 마음이 가라앉는 저녁에 천천히 올라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시에서 소설로, 발걸음이 이어지는 길

이 기행이 더 풍성하게 느껴지는 건, 한 사람의 문학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 창의문에서는 백석 시인의 시 <창의문외>를 떠올리게 됩니다.
  • 현진건 집터에서는 소설 <운수 좋은 날>을 되새기게 됩니다.

윤동주의 시로 시작해 백석의 시를 지나, 현진건의 소설로 닿는 길. 시와 소설이 발걸음 위에 차곡차곡 포개지는 이 부암동 문학기행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조용히 일러줍니다.

힘든 시대를 살면서도 끝내 우리말을 붙들었던 분들의 자취가, 지금 우리가 걷는 평범한 골목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요.

결론: 마음이 흐릴 때, 천천히 한 코스를 걸어보세요

오늘 함께 살펴본 부암동 문학기행은, 멀리 떠나지 않고도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가압장에서 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난 공간, 우물에 비친 나를 들여다보는 시, 시비 뒤편까지 새겨진 또 한 편의 시, 그리고 시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발걸음까지. 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을 걸어주는 듯합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조금 헛헛하시다면, 이렇게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 첫째, 출발은 청운동의 윤동주문학관으로 정하세요. 우물과 영상 전시를 천천히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좋습니다.
  • 둘째, 무리하지 말고 별뜨락에서 한 번 쉬어 가세요. 숨을 고르고 다시 시인의 언덕으로 향하면 됩니다.
  • 셋째, <서시> 시비는 꼭 뒷면 <슬픈족속>까지 확인하시고, 여유가 된다면 창의문과 현진건 집터까지 시와 소설을 따라 이어 걸어보세요.

저는 이 길이, 걱정 많은 우리에게 가장 단단한 한 줄을 건넨다고 믿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그 마음처럼, 오늘 우리도 그저 한 걸음씩 걸어보면 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