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저는 처음 이 뮤지컬 소식을 봤을 때 묘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지난달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개막한 창작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가 올해는 4가지 버전을 순서대로 만난다고 했거든요. 2012년 초연 이후 7번의 시즌을 거치며 사랑받아온 이 작품, 이번엔 정말 흥미로운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1926년의 불 속에서 피어난 네 개의 진실
뮤지컬의 배경은 1926년 독일 심리학자 그라첸 슈워츠 박사의 대저택에서 일어난 의문의 화재 사건입니다. 대저택이 불에 싸인 뒤, 네 남매인 한스와 헤르만, 요나스, 안나는 살아나갔지만 기억을 잃고 맙니다. 그들의 보모 메리 슈미트는 진실과 함께 사라져버렸어요.
작품은 이 단순해 보이는 설정에서 출발해 네 남매의 각기 다른 기억을 따라가며 비극적인 진실을 하나씩 드러냅니다. 그런데 여기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같은 화재 사건이지만,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거예요.
각자의 상처, 각자의 버전
6월 18일부터 9월 6일까지 차례로 공연되는 네 버전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한스 버전―메리 포핀스 살인사건을 위한 변호' (6월 18일∼7월 12일)는 완벽해 보이지만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첫째의 관점입니다. '헤르만 버전―모래 사나이가 나오는 꿈' (7월 17일∼8월 9일)은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이면서도 불안한 성정을 지닌 둘째를 통해 봅니다. '요나스 버전―숲의 기억' (8월 14∼23일)은 트라우마로 공황장애를 앓는 막내의 세상을 담아내고, 마지막 '안나의 방' (8월 28일∼9월 6일)은 평범함을 꿈꾸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의 음악 교사로서의 삶을 조명합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각자의 트라우마, 각자의 두려움이 있으니, 같은 그날의 기억도 다르게 남아 있는 거예요.
내 기억도, 그럼 타당할까
이런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나요?
친구와 같은 일을 겪었는데 기억이 다르고, 가족과 과거 사건을 이야기할 때 서로 본 것이 완전히 다르고, 또 그 차이가 자꾸만 상처가 되는 경험들 말입니다. "그때 넌 이랬어"라는 말을 들으면, 내 기억을 의심하기도 하고, 혹은 내가 틀렸을 거라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내가 본 세상, 내가 느낀 감정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작은 불안감이 생기죠.
비슷한 처지의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이 걱정. '블랙 메리 포핀스'는 그 걱정 속에서 하나의 단단한 지점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각자의 기억도 모두 진실이다
뮤지컬의 무대는 비틀어진 액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각 턴테이블과 의자 같은 최소한의 소품만 올려져 있고, 조명의 움직임과 배우의 동선, 음악으로만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하네요. 이 간결함 자체가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화려한 세트가 아니라, 순수하게 각 캐릭터의 내면과 그들이 기억하는 방식에만 집중하게 한다는 거죠.
같은 일도 각자의 관점에서는 진실이고, 그 관점들이 모여야 진짜 그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 그건 곧 내 기억도, 내 감정도, 내 관점도 타당하다는 말 아닐까요.
결론: 당신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싶다
9월 6일까지 네 가지 버전이 차례대로 만나는 '블랙 메리 포핀스'. 혹시 당신도 누군가와 기억이 달라 답답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차이를 "싸움"이 아니라 "관점"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해줄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 하나의 버전부터라도 접해보세요.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보거나, 다양한 버전이 어떻게 다른지 호기심을 가져보세요.
- 당신의 기억, 당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보세요. 혼자 의심하고 자책하지 말고, 자신의 관점을 말할 용기를 내보세요.
- 상대의 관점도 들어주세요. 내가 다르게 본 것처럼, 상대도 자신의 이유가 있으니까요.
같은 화재 사건 속에서도 네 남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기억 속에서, 당신의 관점 속에서 충분히 타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