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유독 책이 생각나지 않나요?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의 말이나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어지는 그런 날들 말이에요. "이 우울함이 언제쯤 걷힐까", "혼자만 이렇게 처진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도 함께요.

저는 최근에 비 오는 날 사람들이 어떤 책을 떠올리는지 담은 기사를 읽었어요. 건축가, 시인, 번역가, 수의사, 독립서점 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이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준 책 한 권씩을 소개했거든요. 그들의 추천과 그 이유를 읽으며 느낀 건, 비 오는 날 책이 얼마나 큰 위로와 해소가 될 수 있는지라는 거였어요.

함께 비를 마주할 때의 따뜻함

경북 경주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양상규 대표는 박준 시인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꼽았어요. 그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비를 바라보는 시간이 얼마나 따뜻한지 조용히 알려준다"고 했는데, 이 말이 정말 와닿더라고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이 시간을 견딘다는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되지 않나요. 비 오는 날의 불안함, 그 속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함께 본다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죠.

우울함을 거쳐 도달하는 상쾌함

시인 서윤후는 일본 소설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단편집 '레몬'을 추천했어요. 병자의 불안과 우울을 그렸지만 결국 삶을 긍정하는 작품이라고요. 서윤후 시인은 특히 "침착하게 한 번 달콤한 눈물을 흘리고 보니 그것은 상쾌한 우울이었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정말 우리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지 않나요.

우울함을 다 느끼고 난 후에 오는 그 상큼한 감각, 그걸 "상쾌한 우울"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비 오는 날 무거워졌던 마음도 결국 어딘가로 흘러가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선명해진다는 뜻일 수도 있죠.

각자 다른 관점으로 본 세상

번역가 노승영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실린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소개했어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꼭 기억하고 싶은 얼굴이나 사건이 마치 퍼즐의 빈자리처럼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속상할 때가 있는데, 천재적인 기억력의 대가로 다른 걸 잃어야 했던 푸네스를 떠올리면 위안을 얻는다"고요.

우리가 놓치는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다는 깨달음이죠. 비 오는 날 불완전한 기억들로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건축가 강미현은 황미나 작가의 SF 만화 '레드문'을 떠올린다고 했어요. 중고교 시절 형제자매들과 함께 푹 빠져 읽었던 작품인데, "지붕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처마 끝에선 빗물이 하루 종일 흘러내렸던 기억 속에서, 언니, 동생들과 툇마루에 나란히 엎드려 찐 옥수수를 먹으며 만화를 돌려 읽었다"고 회상했어요. 비 오는 날은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나눴던 따뜻한 순간들을 소환하기도 하네요.

청주동물원의 수의사 김정호는 과학서 '이토록 굉장한 세계'를 추천했어요. 그의 말이 특별했는데, "인간은 비가 오면 시야가 흐려졌다고 느끼지만, 청각으로 사냥하는 올빼미는 비를 통해 세상을 오히려 선명하게 본다"는 거예요. 같은 비인데,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깨달음이죠.

비 오는 날도 당신의 무대가 될 수 있어요

비 오는 날 우리가 책을 찾는 건, 단순히 시간을 때우려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타당하구나" "혼자가 아니구나"라고 느끼고 싶어서일 거예요.

다섯 명의 추천이 보여주는 건 바로 그거 같아요. 우울함도 아름답다는 거, 혼자가 아니라는 거,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거요. 기억할 수 없는 것도 가치 있고,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은 영원히 남는다는 거죠.

다음 번 장마철이 찾아올 때, 아니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좀 무거울 때, 당신도 이런 책 한 권을 손에 들어보세요. 빗소리와 함께 읽고 나면 분명 상쾌해질 것 같은, 그런 책을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