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저는 이 문장을 다시 마주한 순간, 잠시 화면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김초엽 작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아끼는 분이라면, 이 한 줄이 얼마나 따뜻하게 가슴을 누르는지 아실 거예요.

이 소식을 처음 봤을 때, 제 마음

어제, 그러니까 6월 3일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메가폰을 잡은 분은 허평강 감독(44)이에요. 솔직히 처음엔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어요. 사랑하던 문장이 화면으로 옮겨질 때, 그 결이 깎여 나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요.

그런데 제작기를 읽어 내려가며 그 걱정이 천천히 풀렸습니다.

  • 2019년 제작사 추천으로 책을 접하고, 7편 중 ‘순례자들…’에 마음을 빼앗긴 감독
  • 이듬해 김 작가와 판권 계약을 맺고, 각색을 포함해 6년을 들인 시간
  • 연필로 그린 600컷의 러프 스케치를 토대로 한, 고집스러운 아날로그 작업

비슷한 처지의 우리는 무엇을 걱정할까

원작을 아끼는 독자라면 아마 비슷한 질문을 품고 있을 거예요. “원작이 훼손되면 괜찮을까”, “화려한 기교가 그 조용한 메시지를 덮어버리지 않을까” 하고요.

허 감독의 답이 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기교가 화려할수록 메시지가 심플하게 다가가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더 클래식한 그림체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넉넉지 않은 제작비 탓도 있었지만, 2006년부터 일본 TV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해온 그에게 수작업은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고 해요. 요즘의 미감과는 거리가 있어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는 점도, 감독은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그 걱정 속에서도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한 지점

저는 이 작품이 건네는 가장 단단한 위로가, 캐릭터를 향한 주문에 담겨 있다고 느꼈어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귀마와 요괴의 초기 디자인을 맡았던 위현송 씨에게, 감독이 건넨 요청은 단 두 가지였습니다.

  • “너무 예쁘지 않을 것”
  • “대신 그들의 결핍이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울 것”

“핸디캡이 있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소녀들의 이야기이기에, 완벽하진 않아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원했다”는 말. 저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봅니다. 완벽하지 않은 게 흠이 아니라, 오래 볼수록 사랑스러운 결핍이 될 수 있다는 것.

영화는 원작도 대범하게 변주합니다. 편지를 받는 수신자에 그쳤던 소피가, 행성의 규칙에 의문을 품고 직접 시초지로 향하는 적극적인 인물로 바뀌었어요. 데이지와 소피의 관계성을 더해 한층 감성적인 결을 입혔고요.

결론

김초엽 소설 ‘순례자들은…’이 애니로 만나는 이 작품은, 완벽함이 아니라 결핍을 사랑스럽게 끌어안는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어떻게 변할까 걱정하던 제 마음은, 6년을 들인 정성과 “실패하지 않는 것”보다 도전을 택한 용기 앞에서 한결 가벼워졌어요.

오늘 바로 해볼 수 있는 일을 나눠둘게요.

  • 원작 먼저 펼치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다시 읽고, 소피와 데이지를 마음에 담아두세요.
  • ‘다름’을 기대하며 관람하기: 클래식한 그림체와 변주된 소피의 능동성을, 원작과 비교하기보다 또 하나의 해석으로 만나보세요.
  • 나의 결핍에 같은 주문 걸기: “완벽하진 않아도 사랑스러울 것”이라는 문장을,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건네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