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한 노인의 불운이 아니라, 우리 금융 시스템의 빈틈을 드러내는 구조적 신호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2021~2025년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보이스피싱 통장 12만6866개를 분석하고, 올 1월부터 5개월간 대포통장 공급 조직 관계자 4명, 피해자 10명, 수사기관 관계자 9명 등 58명을 접촉했다.
현황: ‘대한퍼스트’ 한 곳에서 189명·39억
대포통장은 통장 주인과 실제 사용하는 사람이 다른 범죄용 계좌를 말한다.
- 피해자 유종수(가명·80) 씨는 2023년 10월 18일 가짜 투자 사이트에 속아 전세보증금 4500만 원을 송금했다.
- 그 돈은 ‘대한퍼스트’ 통장으로 옮겨진 뒤 몇 분 만에 현금으로 인출돼 사라졌다.
- 대한퍼스트는 배달 대행업체로 등록됐지만 실은 대포통장을 만들어 파는 유령 회사이며, 유 씨가 송금했을 때 이미 폐업 상태였다.
- 확인된 것만 통장 30개, 피해자 최소 189명, 피해액 39억 원이다.
설립자 김철민(가명·47)은 2024년 10월 붙잡혀 사기 공범으로 전액 배상 판결을 받았으나, 무일푼이라며 버텨 유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다. 실제 배후는 3년째 도피 중이다.
원인: 왜 ‘악마의 통장’이 멈추지 않는가
분석가 관점에서 보면 핵심 원인은 ‘공급’이 ‘적발’보다 빠른 비대칭에 있다. 대포통장은 한 해 32만 개, 하루 876개꼴로 새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검은돈이 오가는 혈관이며, 범죄 조직은 대포통장 없이는 돈을 받을 수도 숨길 수도 없다.
- 법인 명의의 허점: 개인이 아닌 회사 명의 통장은 사실상 송금 한도가 없다. 그래서 5000만 원, 4500만 원이 줄지어 흘러도 걸리지 않는다.
- 사전 경고 부재: 폐업한 회사의 통장이 범죄 수익을 실어 나르는 동안 국세청도 은행도 경고하지 않았다.
- 사후 차단 실패: 폐업 이후에도 계좌가 차단되지 않은 채 ‘죽은 회사의 통장’이 살아 움직였다.
결국 ‘유령 법인 명의 + 무한 한도 + 폐업 후 미차단’이라는 세 구멍이 겹치면, 보이스피싱·투자 사기·온라인 도박이라는 서로 다른 범죄가 하나의 통로로 수렴한다.
전망과 시사점: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
뉴스에 적시된 수치만으로도 흐름은 가늠된다. 피해자 신고보다 통장 생성 속도가 빠른 한, 적발은 늘 한발 늦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법인 명의의 무한 한도가 유지되고 폐업 법인 계좌가 자동으로 차단되지 않는 구조가 그대로라면, 단속만으로 공급을 줄이기는 어렵다는 점이 이 사건의 핵심 시사점이다.
- 실무적 해석: 가짜 투자·사기 자금이 ‘배달 대행’ 같은 평범한 업종으로 등록된 폐업 법인 계좌로 모인다는 점은, 입금 직전 계좌의 사업자 상태(영업/폐업)가 사실상 마지막 방어선임을 뜻한다.
결론
‘악마의 통장’ 사건은 한 노인의 전세금이 단 몇 분 만에 증발한 개인 비극인 동시에, 법인 명의·송금 한도·폐업 계좌 차단이라는 제도적 빈틈이 만든 구조적 사건이다.
독자가 바로 실행할 다음 단계는 다음과 같다.
- 송금 전 확인: 안내받은 입금 계좌가 개인이 아닌 ‘회사 명의’이거나, 받는 곳이 광고 업종과 무관하면 일단 멈춘다.
- 수익 보장 광고 차단: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는 투자 안내와 외부 사이트 송금 유도는 사기 가능성을 우선 의심한다.
- 즉시 신고: 피해가 의심되면 곧바로 금융감독원·수사기관에 신고해, ‘신고보다 빠른’ 인출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