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타인 명의로 개설돼 범죄에 쓰이는 통장)은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 범죄의 자금이 흐르는 '지하통로'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의 추적은 이 통로가 한 사람의 손에서 공장처럼 가동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차분히 따져보면 이 사건은 단순 범죄가 아니라, 금융 인프라의 허점을 파고든 구조적 신호로 읽힌다.

현황: 공개 데이터가 드러낸 '1인 다회사'

추적의 출발점은 정부의 공개 데이터다. 금융감독원은 보이스피싱에 쓰여 동결된 통장 목록(채권소멸 사실공고)을 매주 공개하며,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2만6866개가 등재됐다.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1월 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새로 올라온 통장 1만6854개의 명의를 전수 분석했다.

  • 송금 한도가 커 범죄 조직이 선호하는 회사 통장은 2053개
  • 적발 1~5위 회사는 이름도 주소도 제각각이지만, 대표·이사 자리에 31세 안준호(가명)가 빠짐없이 등장
  • 추적 반경을 넓히자 그와 연결된 회사는 8개, 직함은 대표 3곳을 포함해 11개로 늘어난다

겉보기엔 흩어진 여러 회사지만, 실체는 한 명이 굴리는 단일 조직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원인: 왜 이런 '공장'이 가능한가

이들의 행동에는 매뉴얼처럼 정형화된 수칙이 보인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금융 심사를 우회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제1원칙 — 월 1만 원짜리 주소

사업자등록에 필요한 주소는 월 1만 원 안팎의 비상주 사무실로 해결한다. 전남 나주시의 한 사무실에서는 우편함 하나를 63개 업체가 공유했고, 안준호 일당은 29번째 칸에 이름만 걸어뒀다. 관리자는 "500개 업체를 관리한다"고 했다. 일부는 "은행 실사가 나오면 알아서 대응해 준다"고 광고할 정도다.

제2원칙 — 통신판매업의 빈틈

통장 개설을 위한 은행 심사는 온라인 쇼핑몰을 주 업종으로 내세워 통과한다. 온라인 거래 특성상 초기에 실물 사무실이나 재고가 없어도 통장을 만들기 쉬운 점을 노린 것이다. 현금화가 쉬운 상품권 판매업을 끼워 넣은 경우도 있다.

제3원칙 — 위장 쇼윈도

까다로워진 심사에는 가짜 가구 쇼핑몰까지 동원한다. '모던 소파 89만 원', '원목 다이닝 테이블 45만 원' 같은 그럴싸한 상품을 띄워 실체가 있는 것처럼 꾸민다.

비상주 주소, 통신판매업, 위장 홈페이지. 세 가지 모두 합법 인프라를 범죄에 전용한 것이라는 점이 이 사건의 진짜 무게다.

전망: 지표가 가리키는 방향과 시사점

동결된 통장만 누적 12만 개를 넘지만, 이조차 실제 범죄에 쓰이는 전체 대포통장 규모와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으로 추정된다. 적발이 데이터로 누적·공개되는 만큼, 같은 방식의 역추적은 앞으로도 새 조직을 계속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구조적 한계도 분명하다. 진입 비용이 월 1만 원 수준으로 낮은 한, 한 곳이 적발돼도 다른 명의·주소로 재생산되기 쉽다. 30대가 주축인 조직이 흔치 않다는 점에서 실제 '몸통'이 따로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적발 통계가 늘어도 공급이 쉽게 줄지 않는 구조라는 뜻이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단속의 무게중심이 개별 통장에서 주소·업종이라는 개설 인프라로 옮겨가야 효과가 커진다는 점이다.

결론

이 사건은 한 명이 8개 유령회사를 굴리며 대포통장을 양산한, 저비용 인프라 악용의 전형이다. 공개 데이터로 역추적이 가능했다는 점이 역설적 희망이자 경고다.

  • 개인 차원: 본인 명의 통장·법인이 임의로 쓰이지 않는지 정기 점검하고, 명의·사업자등록 대여 제안은 즉시 거절한다.
  • 거래 차원: 비상주 주소, 신생 온라인 쇼핑몰, 상품권 거래가 겹치는 상대와의 송금은 한 번 더 검증한다.
  • 정책 관찰: 금감원 채권소멸 사실공고 같은 공개 데이터를 단속·검증의 기준점으로 주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