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정비사업이 구청장 한 명의 인사이동에 좌우되는 현실이 드러났다. 종로구 창신9·10구역은 18년 표류 끝에 지난해 11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지난 6월 사업시행자 지정을 신청한 뒤 구청장 교체로 인해 2개월 이상 인허가가 멈춘 상태다. 이런 사례가 잇따르자 정부·여당은 8월 23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500가구 이하 정비사업의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시에서 자치구로 넘기는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미 자치구가 대부분의 인허가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권한 이양만으로는 근본 해결이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비사업을 멈추게 하는 구청장 판단
구청의 인허가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서울의 정비사업은 9개 절차 중 7개를 자치구가 담당한다.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등 가장 중요한 단계들이 구청의 손에 있다는 뜻이다.
창신9·10구역 사태가 대표적이다. 2007년 뉴타운으로 지정됐다가 2013년 해제된 이 구역은 도시재생을 거쳐 2022년 신속통합기획 재개발 후보지로 선정되고, 지난해 11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8년의 표류 끝에 겨우 궤도에 올랐지만, 사업시행자 지정까지는 7개월에 불과했다. 구청장 교체가 없었다면 순조로웠을 일도 이제 미지수가 되었다.
서대문구 북아현3구역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조합이 사업시행계획 변경인가를 신청했을 때 구청은 1년6개월을 검토한 뒤 반려했다. 조합이 행정심판을 제기해 "4개월 안에 결정하라"는 판단을 받았지만, 이미 조합은 조합장 해임과 집행부 공백이라는 혼란 속에 빠졌다. 2008년 조합설립인가를 받고도 18년째 진행 중인 사업이다.
한 조합장은 "정비사업에서 구청장은 사실상 절대적인 갑"이라고 표현했다. 정비구역 지정·해제까지 권한을 넘기면 구청장의 판단에 따라 사업 속도가 결정된다는 우려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권한 이양, 과연 해결책일까
정부·여당이 제시한 해법은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서울시에서 자치구로 이양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작은 규모 정비사업까지 광역자치단체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절차가 과다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현황을 보면 실효성은 제한적이다. 현재 추진 중인 500가구 이하 정비사업 193곳 중 정비구역 지정 단계에 있는 곳은 31곳(16%)에 불과하다. 나머지 84%는 이미 자치구가 담당하는 후속 절차 단계에 있다는 뜻이다.
서울시도 같은 논리로 반박한다. 서울시가 담당하는 것은 정비계획 결정·고시를 위한 심의와 사업시행계획인가 전 통합심의 단 2단계라고 지적한다. 정비구역 지정권을 추가로 넘기더라도 사업 기간 단축 효과는 크지 않다는 주장이다.
진짜 문제는 구청장의 역량과 의지
이 상황은 권한 구도의 문제보다 구청장 개인의 판단과 행정 역량이 더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 조합과의 의견 차이, 지역사회의 이해관계, 행정적 신중함 등 여러 요인이 얽혀 있지만, 결국 구청장이 이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진행 속도가 결정된다.
이미 자치구가 핵심 인허가권을 보유한 상황에서 정비구역 지정권까지 추가 이양한다고 해서 사업 지연이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청장의 개인 판단이 더욱 절대화될 가능성마저 있다.
결론
정비사업의 지연은 단순한 권한 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자치구가 대부분의 인허가 절차를 담당하는 현황에서, 정비구역 지정권까지 이양한다는 것은 표면적 해법일 수 있다.
핵심은 구청장의 역량 강화와 행정 투명성 제도 개선에 있다. 인허가 기준의 명확화, 처리 기한 설정, 부당 반려에 대한 행정심판 절차 강화 등이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권한을 더 준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권한을 어떻게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지가 관건이다.
다음 단계는 정비사업의 인허가 기준과 절차를 법령으로 명확히 정의하고, 지자체별 행정 역량 평가 및 컨설팅을 강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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