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양자 기술 스타트업 엔비전(NVision)이 유기 분자 하나를 양자 정보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로 쓰고, 빛으로 그 상태를 판독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스마트폰 OLED 디스플레이 제조에 활용되는 박막 기술로 기존 광자 반도체 칩에 큐비트를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복잡한 전용 제조 공정에 대한 의존성을 줄여 대규모 양자 컴퓨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주목된다.
엔비전은 28일(현지시간)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논문 제목은 ' 단일 분자 스핀-광자 인터페이스(A Single-Molecule Spin-Photon Interface) '다. 연구진은 개별 유기 분자의 양자 상태를 제어하고 빛으로 판독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연구의 핵심은 양자 정보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와 빛 입자인 광자를 연결하는 것이다. 양자 컴퓨터를 대규모로 확장하려면 큐비트에 담긴 정보를 다른 큐비트나 프로세서로 전달해야 한다. 광자를 활용하면 큐비트를 한 칩에 빽빽하게 모으지 않고도 여러 칩을 연결할 수 있다.
엔비전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물질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필요한 양자 특성을 갖도록 유기 분자를 직접 설계했다. AI로 약 200종의 후보 분자를 분석하고, 이 가운데 40종 이상을 실제로 합성해 검증했다. 최종적으로 빛과 상호작용하면서 양자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카벤(carbene)' 계열 분자를 개발했다.
분자는 원자의 조합을 조정해 원하는 특성을 설계할 수 있고, 같은 구조로 반복 합성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엔비전은 이 특성을 활용해 양자 칩 제조의 복잡성을 낮추려 한다.
연구진이 만든 분자는 전자의 스핀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주파수의 빛을 방출한다. 이를 바탕으로 레이저를 쏴 개별 분자의 양자 상태를 초기화하고, 마이크로파로 상태를 제어한 다음, 빛으로 판독하는 데 성공했다. 엔비전은 단일 유기 분자에서 이 세 과정을 모두 구현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실험에서는 동적 디커플링 기법을 적용했을 때 분자의 양자 상태가 최대 2.2밀리초 동안 유지됐다. 스핀 상태를 바꾸는 데 걸린 시간은 50나노초 미만이었다. 연구진은 양자 정보가 사라지기 전에 상태를 수만 차례 전환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실험은 약 4.5K(영하 268.7도)의 극저온에서 이뤄졌다.
제조 측면에서 주목되는 점은 분자 큐비트를 얇은 막으로 만들어 기존 광자 집적회로(PIC)에 증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OLED 디스플레이의 유기 발광 물질을 얇게 입히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다만 실제 광자 반도체 칩에 분자를 통합한 뒤에도 같은 양자 성능이 유지되는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엔비전은 큐비트를 한 칩에 밀집시키는 대신 광자로 서로 연결하는 광자 기반 양자 컴퓨터를 개발할 계획이다. 칩 안에서뿐 아니라 여러 칩 사이에서도 양자 정보를 전달해, 큐비트 수가 늘어날수록 커지는 제어 복잡성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칩 개발을 위해 미국 광자 반도체 기업 하이퍼라이트(HyperLight)와 전략적 협력도 발표했다. 엔비전은 하이퍼라이트의 박막 리튬나이오베이트(TFLN) 광자 집적회로에 자사의 분자 큐비트를 통합할 예정이다.
셀라 브로시 엔비전 CEO는 "우리는 전체 과정을 직접 수행하고 싶다"라며 "칩을 제조하고 분자를 증착한 뒤 그 위에서 오류 정정까지 구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궁극적으로 판매하려는 제품은 데이터센터에 바로 설치할 수 있는 완성형 컴퓨터"라고 덧붙였다.
엔비전은 2026년 4분기 첫 통합 칩 시제품을 확보하고, 연말까지 실제 광자 집적회로에서 성능을 시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30년까지 물리적 큐비트 1000개를 구현하고, 장기적으로는 오류 정정이 가능한 논리적 큐비트 1000개 규모의 시스템을 개발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엔비전은 처음에는 자기공명영상(MRI)의 영상 품질을 개선하는 기술을 개발하던 기업이다. 전자 스핀을 제어하는 기존 기술을 양자 컴퓨팅 분야로 발전시켰고, 이번 연구를 통해 분자 기반 큐비트를 실제 반도체 칩에 적용할 가능성을 검증하는 단계에 들어섰다.